“‘내가 몸 안에 갇혀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런 나는 –다른 삶–을 살게 될까?”
텍스트 원문
2023.04.29. 자림 작성
2023.04.30. 진광 윤문
2023.05.01. 자림 수정
2023.05.02. 진광 윤문
1라운드 텍스트
『암캐』(The Bitch, 원제: La Perra)를 쓴 콜롬비아 작가 필라르 킨타나가 되어 $거북이와 두루미$가 각색.
작품의 배경을 제안 받았을 때, 콜롬비아의 Chocó주를 제시함.
2023.5.6. 자림 작성 완료
2023.5.6. 진광 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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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한 한옥 양식의 대문이 보였다. 대문의 전반은 옅은 황톳빛의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고, 지붕 간간이 거무튀튀하게 탄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조차 대문의 웅장한 분위기를 더해주는 요소처럼 느껴졌다. 검은 현판에 쓰인 글씨는 멋지긴 했지만 읽을 수는 없었다. 연분홍색의 곱고 반투명한 비단이 대문의 오른편 기둥에 매달려 현판 옆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할머니 집이다.’
나는 그 주변을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대문 앞에 펼쳐진 드넓은 논밭 너머에는 샛초록빛의 파도가 세차게 굽이치는 바다가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옆에서 반대쪽 옆으로 휙휙 지나칠 때마다, 파도는 일정한 높이를 유지하면서 거세게 몰아치면서도, 논밭이 있는 곳까지 다가오진 않았다. 방파제는 없었다. 일정한 궤도를 몇 차례 달리던 와중, 돌연 파도치던 물살 모양과 쏙 빼닮은 모양을 새긴 갯벌이 솟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모습이 마치 축축한 땅의 살결 같았다. 나는 파도의 물살을 떠올리며 ‘그게 물의 살이 아니라 땅의 살이었던가’하고 생각했다. 어쩌면 파도는 친 적도 없었던 것 아닐까. 마치 천이 걸쳐져 있듯이 물이 땅에 걸쳐 있었다면. 바닷바람의 시원스러움 그리고 가까이 다가갔을 때의 촉촉하게 느껴지던 공기는 나의 착각이었을까. 문득 무대장치의 뒷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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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스 산맥 기슭의 웅장한 목조 주택 앞에 섰다. 주택의 전체 구조는 짙은 갈색의 나무로 지어져 있었고, 지붕의 모서리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풍화를 견뎌낸 듯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건물은 웅장함을 발산했다. 검은 현판에 적힌 글씨는 고요한 우아함을 보여 주었지만, 그것을 읽지는 못했다. 구슬로 만든 바다처럼 푸른 천이 현판 옆에 걸려 있어 바람이 부는 것처럼 보였다.
‘이곳이 아버지의 고향이군.’
나는 주변을 빠르게 돌아다녔다. 주택 앞에는 넓은 옥수수 밭이 펼쳐져 있었고, 그 너머로는 산들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오는 계곡이 보였다. 계곡의 맑은 물줄기가 산에서부터 내려와 하늘을 뒤흔들며 시원한 소리를 내며 흘러갔다. 농작물이 자라는 땅은 물이 침투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물이 주변을 적셔주었다. 둑이 없었지만, 물의 힘이 놀라웠다.
나는 갑자기 물줄기가 농작물과 서로 완벽하게 어울리는 듯한 모습을 발견했다. 마치 물이 땅에게 수분을 주는 것처럼 보였다. 물의 힘이 아니라, 땅의 힘이었을까? 어쩌면, 이 땅은 물과 공존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산에서 내려오는 시원한 공기와 물이 만나는 지점의 습도는 혼란스러웠다. 문득,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퍼즐 조각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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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툰 젓가락 행진곡이 울릴 때, 나는 햇살이 비치는 거실에 있었다. 호두색의 단정한 업라이트 피아노가 레이스 천에 살포시 덮인 채 그곳에 놓여 있었다. 여느 여름마다처럼 하얀 런닝과 연하늘색 트렁크를 입은 아빠가 서서 건반을 뚱땅이고 있었다. 딸은 졸린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어.” 아빠가 말했다.
언젠가—누군가가 누군가의 손에 나를 쥐여주었다.
“이상하네, 커다란 모과 세 개가 이 두 손에 다 들려지다니.”
얼핏 누군가 이 말을 했을 때 곧장 그 말은 안개처럼 푸스스 흩어졌다. 나는 거실 수납장 선반의 소쿠리에 놓여 있었는데, 가끔 딸은 내 옆을 지나가다 멈춰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손톱으로 껍질을 살짝 긁어내 킁킁 냄새를 맡기도 하고 혀를 대어보거나 이로 깨물었다. 그럴 때면 나는 빗방울을 머금은 바닷바람을 온몸에 입고 있는 것 같았다. 푸스스, 하고 살결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 애는 나를 들고 놀다가 자주 떨어뜨렸고, 그럴 때마다 나는 데구루루 거실을 굴렀다. 나는 책장 어딘가에 올라앉아 있다가, 햇살이 드는 쪽 화분 옆에 누워있기도 하고, 피아노 선반 위 유리 접시에 한동안 놓여 있기도 했다. 얼마 전, 커다란 사람 여러 명이 붙어서 조심조심 피아노를 거실에 실어다 두었다. 그들이 피아노를 들고 들어올 때 딸은 만세를 불렀다. 곧 나는 유리 접시에 놓였다.
아빠의 무테안경이 손에 붙잡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악보를 읽어내려 하는 듯했다. 행진곡은 형편없었다. 딸은 그냥 웃었다. 건넌방에 누워있던 엄마도 일어나 부스스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빠가 오른쪽에서 멜로디를 연주하면 딸은 왼쪽에서 코러스를 연주했다.
그날 밤도 어김없이 딸의 잠투정이 시작되었다. 그 애는 조금씩 잠에 들라치면 자꾸 오줌이 마렵다고 했다. 아빠는 딸의 등을 토닥이며 나지막이 노래를 불렀다.“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 구두 사 가지고 오신다더니.”머지않아 칭얼거림은 잦아들고 곧장 새근대는 숨소리가 들렸다.
그 집은 가족 중 누군가의 소유인 모양인지, 딸이 물려받을 예정이라고 했다. 누가 그렇게 말했더라, 단지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말을 어느 한적한 오후 낮잠 속에서 들었던 것 같다.“꿈을 꿨는데 아빠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더니, 아빠는 오늘부터 논어를 배우러 향교에 다닌다고 했다.
“그걸 배워서 족보를 좀 해석해 보려고.”
양손의 리듬이 일정하지 않아 젓가락 행진곡이 뭉개지는 것처럼 그렇게 족보를 읽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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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기타 선율이 들려올 때, 나는 햇살이 비치는 거실에 있었다. 그곳에는 고풍스러운 목제 기타가 레이스 천이 덮인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그날은 아버지가 손에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며 연주하고 있었다. 딸은 졸음을 달래며 거실로 걸어왔다.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어.” 아버지가 말했다.
언젠가—누군가가 누군가의 손에 나를 쥐어주었다.
“이상하네, 커다란 마음이 이 작은 몸에 들어가 있다니.”
얼핏 누군가 이 말을 했을 때 곧장 그 말은 안개처럼 사라졌다. 나는 거실 선반에 놓여 있었는데, 가끔 딸이 내 옆을 지나가다 멈춰서 나를 들여다보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산들바람을 온몸에 느끼며 행복해졌다. 그 애는 나를 들고 놀다가 자주 떨어뜨렸고, 그럴 때마다 나는 거실을 구르며 웃음소리를 내었다. 나는 책장 어딘가에 올라앉아 있다가, 햇살이 드는 쪽 화분 옆에 누워있기도 하고, 기타 선반 위에 한동안 놓여 있기도 했다. 얼마 전, 아버지가 기타를 메고 들어올 때 딸은 환호했다. 곧 나는 기타 옆에 놓였다.
아버지의 눈은 악보를 읽어내려 가면서 움직였다. 선율은 아름다웠다. 딸은 활짝 웃었다. 옆 방에서 누워 있던 어머니도 일어나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버지가 오른쪽에서 멜로디를 연주하면 딸은 왼쪽에서 코러스를 따라 했다.
그날 밤도 어김없이 딸의 잠투정이 시작되었다. 그 애는 조금씩 잠에 들라치면 자꾸 오줌이 마렵다고 했다. 아버지는 딸의 등을 토닥이며 나지막이 노래를 불렀다.“우리 아이가 바다를 건너 돌아오면,
푸른 섬 그리고 밤하늘의 별을 안고 올 거야.”머지않아 딸의 울음소리는 잦아들고 곧 잠이 든 숨소리가 들렸다. 그 집은 가족 중 누군가의 소유인 모양인지, 딸이 물려받을 예정이라고 했다. 누가 그렇게 말했더라, 단지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말을 어느 한적한 오후 낮잠 속에서 들었던 것 같다.
“꿈을 꿨는데 아빠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더니, 아버지는 오늘부터 역사를 배우러 도서관에 다닌다고 했다.
“그걸 배워서 가문의 역사를 좀 연구해 보려고.”
양손이 역사의 페이지를 일정하게 넘기면서, 기타 선율처럼 그렇게 가문의 역사를 읽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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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를 펼치면 도식적인 모양으로 무덤의 위치와 그 주변이 그려져 있었다. 그렇게 생긴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던 적이 있다. 정갈한 모습으로 누워 있는 무덤들 옆에는 곧 사과가 열릴 법한 나무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는데, 그 나무들이 놓인 길을 계속 걷다 보면 꼭 수평선이 나올 것만 같았다. 실제로는 그 길 끝에 호수가 있었다. 호수 한 편에는 드나들며 낚시를 할 수 있도록 간이 방이 딸린 배들도 있었다. 그 위로 새들이 날아다녔다. 물살을 가르며 날아오르는 새를 따라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마치 반짝이 종잇조각들을 흩뿌리는 것처럼 보였다.
흩날리는 종이들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이윽고 폭죽이 터졌다. 커다란 원형 경기장의 바닥은 밝은 주황색으로, 하얀색 줄들이 그어진 넓은 트랙이었다. 알록달록한 색종이를 날리며 다양한 존재들이 시끌벅적하지만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이동하고 있었고 나는 그들을 구경하는 한편 트랙의 선을 따라 주장을 찾아갔다. 짙은 남색 경기복을 입은 그(녀)(them)를 발견했을 때 그(녀)(them)의 짧고 검은 머리가 살짝 젖은 채로 휘날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them)를 보자마자 그(녀)(them)가 여성(female)임을 느꼈지만, 그(녀)(them) 스스로가 그렇게 여기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녀)(them)가 가진, ‘단정 지을 수 없음’의 아름다움을 감각하면서 나는 그(녀)(them) 앞에 마주 섰다.
“두고 온 게 있어서요. 찾으러 갔다가 다시 올게요.”
주장은 공을 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허락을 받긴 했지만 빨리 다녀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없다. 곧 경기가 시작될 것이다.
“이 경기에서 난 중요해.”
트랙의 경계선들을 가로지르며 걷다 보니 어느덧 시냇물이 흐르는 자갈밭 위였다. 나는 문득 내 발을 감싸 흐르는 차갑고 얇은 물살을 느꼈고, 아 신발을 잃어버렸군, 하고 냇물의 상류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만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내가 무엇을 찾으려고 했었는지 쉽게 잊어버리곤 했다. 그들과 내가 계곡 어귀에 누워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많은 세월이 아주 느리게 지나갔다.
떠내려온 신발들이 모여있는 웅덩이를 보았는데, 그중에는 내 신발도 있었다. 물속에 손을 넣어 건져 올렸더니 그 신발은 아기가 신을 법한 작은 운동화로 변해 있었다. -
가문의 역사가 담긴 책을 펼치면 도식적인 모양으로 무덤의 위치와 그 주변이 그려져 있었다. 그렇게 생긴 길을 따라 끊임없이 걸어가 본 적이 있다. 산산조각난 돌들로 만들어진 무덤들이 열대우림의 그늘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무덤들 옆으로는 곧 열매가 맺힐 나무들이 길게 뻗어있었다. 그 나무들을 따라 계속 걸으면 언젠가 그 길의 끝에 다다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실제로 그 길 끝에는 호수가 있었다.호수 한쪽에는 간이 선착장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사람들이 낚시를 즐길 수 있도록 배들이 떠 있었다. 호수 위로는 야생 새들이 아름다운 군무를 선보이며 날아다녔다. 물살을 가르며 날아오르는 새들이 휘저으면 물방울들이 그 위로 흩날리곤 했다. 그 물방울들은 마치 반짝이는 보석들이 하늘에 흩어지는 것처럼 빛났다.
그리고는 사라졌다. 이윽고 폭죽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마을 광장에서 진행되는 축제의 한복판에 서 있음을 발견한 나는, 마음을 끄는 주황빛 무대와 하얀색 선들이 그려진 춤터를 바라보았다. 알록달록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움직이며, 열기와 열정에 빠져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구경하며 무대 가까이에서 친구를 찾아 나섰다. 진한 남색 옷을 입은 그(녀)(them)를 발견했을 때, 그(녀)(them)의 짧고 검은 머리가 땀에 젖은 채 휘날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them)를 보자마자 그(녀)(them)가 여성(female)임을 느꼈지만, 그(녀)(them) 스스로가 그렇게 여기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녀)(them)가 가진, '단정 지을 수 없음'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나는 그(녀)(them) 앞에 섰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꼭 찾아야 할 게 있어서요.”
그(녀)(them)는 무게를 실은 듯한 눈빛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them)의 동의를 얻긴 했지만, 빨리 다녀와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해졌다. 시간이 없다.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가 곧 시작될 것이다.
“이 춤에서 난 중요해.”
하얀색의 경계선들을 가로지르며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시냇물이 흐르는 자갈밭에 이르렀다. 나는 문득 발 아래로 감싸올라오는 차갑고 얇은 물살을 느꼈고, 신발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냇물의 상류로 되돌아가며 주변을 살폈다. 중간중간 만나는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때로는 잠시 멈춰 얘기를 나눴다. 그들과 나눈 시간은, 마치 고요한 계곡에서 느리게 흐르는 세월처럼 느껴졌다.
드디어 떠내려온 신발들이 모여있는 웅덩이를 발견했다. 그중에서도 내 신발이 있었다. 물속에 손을 넣어 신발을 건져 올렸지만, 그것은 이제 아기가 신을 법한 작은 운동화로 변해 있었다. 이 놀라운 변화는 마치 자연의 신비로운 기운이 감돌고 있는 일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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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죽기 바로 전에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애미야. 나 이제 오줌 안 싼다. 그러니까 너네 집에 가고 싶다.”
너무 짙은 초록색의 지하 주차장에 한참 서 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병원에 있던 모습이 기억나지 않는다. 산책하러 나가려던 참이었다. 할머니의 굳은 얼굴에 모시 천이 감싸지는 것을 보는 순간에도. 호수가 있는 도시에서였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우리는 배 위에 올라탔다. 나는 울지 않았다. 나는 그들과 여행 중일 때 늘 울상이었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여행인지를 몰랐다. 그래도 너무 짙은 숲속은 같이 걸어야 했다. 쉬지 않고 잠이 쏟아졌다. 내가 먼저 들어가겠다고 말하니, 우리 중 누군가가 내 팔에 매달렸다. 그 애를 내려다보며 문득 나는, 엄마로서 할 수 있는 말들을 떠올렸다. ‘들어가는 길’의 계단은 하나하나 커다랬고, 일정하지 않은 리듬으로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계단의 움직임을 조종할 수 있는 버튼은 오른쪽 벽에 붙어 있었고 나는 물건을 하나씩 들고 이동해야 했다. 반대편에서 연분홍색 단발머리를 한 새하얀 피부의 사람이 기다랗고 뾰족한, 시퍼렇게 날이 선 창을 들고 내 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가 입은 새빨간 기모노가 축 처진 채, 같은 빛깔의 액체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내 쪽으로 주의를 두지 않도록 눈에 띄지 않으려 각별히 신경 썼다. 나와 그는 반대 방향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딸은 달랐다. 온몸을 곤두세우고는 곧장 그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딸의 목덜미를 잡아당기며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왜 그래 너? 귀신이 너를 자꾸 오라고 부르니?”
엄마답지 않은 말. 서럽게 울어도 하는 수 없어.
한여름이면 물도 목이 마르는지 수위가 낮아져, 직접 강을 걸어 여의도까지도 다다를 수 있었다. 어머니의 오빠가 그곳에 살고 있었다. 나는 꼭 한 번, 아버지와 같이 그곳에 간 적이 있다. 곱게 싼 보따리를 버스에선 내가 들고, 전차에서는 아버지가 들고. 어머니도, 형도, 동생도 없이 아버지와 둘만의 시간이었다. 바지를 걷어 강물에 발을 담그니, 등짝에 흐르던 땀줄기 옆으로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나는 다리로 휘휘 물살을 저으며 물밑을 살폈다. 아버지는 벌써 저만치에서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히히 웃었다. 강물의 동심원도 웃음소리에 맞춰 동그랗게 퍼졌다. 멀리서 다리를 건너는 전차의 땡땡 소리가 귓전에서 위잉위잉 울렸다. 모기장을 치고 누나들과 밤늦도록 놀다가 지쳐 잠에 들었다. 나와 아버지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때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부터 몇 년간은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 보따리를 아무리 헤집어 봐도 비단 구두 같은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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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죽기 바로 전에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애미야. 나 이제 오줌 안 싼다. 그러니까 너네 집에 가고 싶다.”
해안 마을에서, 우리는 할머니의 마지막을 함께 보냈다. 그늘이 짙은 항구에 정박해 있는 낡은 배 위에서, 나는 할머니가 검은 장막으로 덮인 상자 속에 담겨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른 아침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우리는 정글을 헤치며 할머니를 데려가는 길을 걸었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여행인지를 몰랐다. 그래도 너무 짙은 정글은 같이 걸어야 했다. 쉬지 않고 잠이 쏟아졌다. 내가 먼저 들어가겠다고 말하니, 우리 중 누군가가 내 팔에 매달렸다. 그 애를 내려다보며 문득 나는, 엄마로서 할 수 있는 말들을 떠올렸다.
낡은 나무 다리를 건너며, 우리는 한 발짝씩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다리는 높이가 일정하지 않고, 어둠 속으로 뻗어 있었다. 나무 다리를 건너는 동안, 나는 물건을 하나씩 들고 이동해야 했다. 반대편에서 태양을 가린 머리카락과 가슴쪽까지 내려오는 검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휘청거리며 뾰족한 낫을 들고 내 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녀의 옷은 피가 엉겨 붙어 축 처진 모습이었다. 나는 그녀가 내 쪽으로 주의를 두지 않도록 눈에 띄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딸은 달랐다. 온몸을 곤두세우고는 곧장 그 검은 원피스 차림의 여성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딸의 목덜미를 잡아당기며 소리를 질렀다.“도대체 왜 그래 너? 귀신이 너를 자꾸 오라고 부르니?”
엄마답지 않은 말. 서럽게 울어도 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은 걱정과 두려움으로 뒤섞여 있었다. 그 숲속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운명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한여름의 연안가는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해안가를 따라 조용한 마을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다. 어머니의 오빠가 그곳에 살고 있었다. 나는 꼭 한 번, 아버지와 같이 그곳에 간 적이 있다. 소포를 농장용 트럭에선 내가 들고, 나중에는 아버지가 들었다. 어머니도, 형도, 동생도 없이 아버지와 둘만의 시간이었다. 바다에 발을 담그니, 등짝에 흐르던 땀줄기 옆으로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나는 다리로 휘휘 파도를 저으며 물 밑을 살폈다. 아버지는 벌써 저만치에서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히히 웃었다. 파도의 동심원이 웃음소리에 맞춰 동그랗게 철썩였다. 멀리서 다리를 건너는 오래된 버스의 경적 소리가 귓전에서 위잉위잉 울렸다. 모기장을 치고 누나들과 밤늦도록 놀다가 지쳐 잠에 들었다. 나와 아버지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때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부터 몇 년간은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 소포를 아무리 헤집어 봐도, 그 앞바다에 떠 있던 푸른 섬과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던 물건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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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두고 왔네. 좀 가져다줘.”
햇볕이 너무 강하다. 여기 서 있기에 당신은 너무 기운이 없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데.
저쪽에서도 걱정스러운 눈으로 당신을 계속 쳐다보고 있다.“얼른 가서 가져다줘.”
안 돼.
“얼른.”
저쪽은 반대편으로 얼른 갔다.
당신은 내 쪽으로 얼른 왔다.
저쪽은 이쪽 편으로 가지고 왔다. -
“그걸 두고 왔네. 좀 가져다줘.”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너는 여기 서 있기에 너무 지쳐 보인다.
마치 곧이어 기운이 빠져 무너질 것 같아.
저편에서도 걱정스러운 눈길로 너를 지켜보고 있다.“얼른 가서 가져다줘.”
아니, 그럴 수 없어.
“얼른.”
저편은 반대편으로 서두르며 갔다.
너는 내 품으로 서두르며 왔다.
저편은 이리로 가지고 왔다.무거운 태양 아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가는 듯 했다. 마치 세상이 한 순간에 멈춰서, 이곳에만 마법이 퍼져 나갔다. 너와 나, 그리고 저편에 서 있는 이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놓여 있었다. 세상의 무게를 지탱하는 듯한 그 선은, 아름다운 꽃들처럼 우리를 이어주며, 잠시의 숨결로 서로를 향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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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인 듯, 여기저기서 전 부치는 기름 냄새가 났다. 나는 축제가 벌어지는 건물의 복도를 걸으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떠들썩한 가운데, 다들 내가 입은 옥색 한복에 대해 한마디씩 했다. 모두 웃는 얼굴이었다. 건물 1층의 입구로 내려오니, 어느덧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옥색 한복을 멋지게 빼입은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이가 건너편 건물의 위층에 있었는데, 비를 맞아서는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나는 그곳에 서서 하염없이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새하얬던 버선이 어느덧 빗물에 젖어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리본처럼 하늘하늘한 천을 들고, 길게 이어진 복도를 따라 같은 옷을 입은 친구들을 따라갔다. 우리는 무대에 설 것이다. 그러던 중, 맞은 편에서 돌아오던 나를 만났고, 어느새 ‘우리들’ 여럿은 황톳빛 갈색의 곡선이 두드러지는 의자에 둘러앉아, 작은 식탁을 가운데에 두고 서로를 둘러쌌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무언가를 확인했고, 그 증표로 연분홍색의 리본을 식탁 한편에 묶어 둔 채 무대로 향했다. 무대 저편에서 촉촉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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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같았다. 곳곳에서 아레파와 엠파나다, 옥수수와 치즈로 만든 따뜻한 과자들의 향긋한 냄새가 났다. 나는 축제가 벌어지는 마을의 길을 걸으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막연하게 번잡한 듯한 분위기 속에서, 내가 입은 루이살렌테->팔렌케라 팔렌키(Palenquera Palenque)는 새순 같은 연두색에 금빛 장식이 반짝였다. 모두들 그 모습에 웃음을 띠며 칭찬해줬다.
마을 입구에 이르니, 어느덧 하늘에서는 거칠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는 도랑을 넘치게 하며, 어린이들이 물장구를 치는 모습과 겹쳐져 희한한 축제를 연출했다. 팔렌케라 팔렌키(Palenquera Palenque)를 멋지게 차림한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건너편 오두막의 창가에 있었는데, 이런 폭우를 맞으며 가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나는 그곳에 서서 끝없이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발에 두른 샌들의 끈이 빗물에 젖어 어둡게 변하며 물방울이 맺혔다.
같은 팔렌케라 팔렌키(Palenquera Palenque)를 입은 친구들과 함께 걷는 길을 따라갔다. 우리는 무대에 설 것이다. 그러던 중, 맞은 편에서 돌아오던 나를 만났고, 우리들이 나무 그늘에 모인 순간, 비가 그쳤다. 어느새 ‘우리들’ 여럿은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쬐는 나무 그늘에 둘러앉아, 작은 식탁을 가운데에 두고 서로를 둘러쌌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무언가를 확인했고, 샌들에 묶인 푸른 구슬들이, 그들이 별이자 섬이었음을 상기시켰다. 이들 구슬이 바다처럼 푸른 천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마치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품은 푸른 섬이 어느새 발밑에 펼쳐진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인사를 나누고, 그 증표로 구슬로 만든 바다처럼 푸른 천을 식탁 한편에 묶어 두었다. 마음이 편안해진 나는 이제 건너편 오두막에 있는 친구에게 달려갈 수 있었다. 물웅덩이를 피해 가볍게 건너뛰며, 나는 오두막으로 향했다. 친구가 서 있는 창가 옆에 도착했을 때, 그의 눈에 빛이 번쩍이며 나를 환영했다. 그는 팔렌케라 팔렌키를 입은 나의 모습에 놀라움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며, 함께 춤을 추자고 제안했다. 그는 활짝 웃으며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