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림두수 紫林斗數 Zarim Dou Shu

죽음과 추억 사이에서…

“‘내가 몸 안에 갇혀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런 나는 –다른 삶–을 살게 될까?”

궁금하다면 으로...

텍스트 원문
2023.04.29. 자림 작성
2023.04.30. 진광 윤문
2023.05.01. 자림 수정
2023.05.02. 진광 윤문

  • 웅장한 한옥 양식의 대문이 보였다. 대문의 전반은 옅은 황톳빛의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고, 지붕 간간이 거무튀튀하게 탄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조차 대문의 웅장한 분위기를 더해주는 요소처럼 느껴졌다. 검은 현판에 쓰인 글씨는 멋지긴 했지만 읽을 수는 없었다. 연분홍색의 곱고 반투명한 비단이 대문의 오른편 기둥에 매달려 현판 옆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할머니 집이다.’

    나는 그 주변을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대문 앞에 펼쳐진 드넓은 논밭 너머에는 샛초록빛의 파도가 세차게 굽이치는 바다가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옆에서 반대쪽 옆으로 휙휙 지나칠 때마다, 파도는 일정한 높이를 유지하면서 거세게 몰아치면서도, 논밭이 있는 곳까지 다가오진 않았다. 방파제는 없었다. 일정한 궤도를 몇 차례 달리던 와중, 돌연 파도치던 물살 모양과 쏙 빼닮은 모양을 새긴 갯벌이 솟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모습이 마치 축축한 땅의 살결 같았다. 나는 파도의 물살을 떠올리며 ‘그게 물의 살이 아니라 땅의 살이었던가’하고 생각했다. 어쩌면 파도는 친 적도 없었던 것 아닐까. 마치 천이 걸쳐져 있듯이 물이 땅에 걸쳐 있었다면. 바닷바람의 시원스러움 그리고 가까이 다가갔을 때의 촉촉하게 느껴지던 공기는 나의 착각이었을까. 문득 무대장치의 뒷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서툰 젓가락 행진곡이 울릴 때, 나는 햇살이 비치는 거실에 있었다. 호두색의 단정한 업라이트 피아노가 레이스 천에 살포시 덮인 채 그곳에 놓여 있었다. 여느 여름마다처럼 하얀 런닝과 연하늘색 트렁크를 입은 아빠가 서서 건반을 뚱땅이고 있었다. 딸은 졸린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어.” 아빠가 말했다.

    언젠가—누군가가 누군가의 손에 나를 쥐여주었다.

    “이상하네, 커다란 모과 세 개가 이 두 손에 다 들려지다니.”

    얼핏 누군가 이 말을 했을 때 곧장 그 말은 안개처럼 푸스스 흩어졌다. 나는 거실 수납장 선반의 소쿠리에 놓여 있었는데, 가끔 딸은 내 옆을 지나가다 멈춰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손톱으로 껍질을 살짝 긁어내 킁킁 냄새를 맡기도 하고 혀를 대어보거나 이로 깨물었다. 그럴 때면 나는 빗방울을 머금은 바닷바람을 온몸에 입고 있는 것 같았다. 푸스스, 하고 살결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 애는 나를 들고 놀다가 자주 떨어뜨렸고, 그럴 때마다 나는 데구루루 거실을 굴렀다. 나는 책장 어딘가에 올라앉아 있다가, 햇살이 드는 쪽 화분 옆에 누워있기도 하고, 피아노 선반 위 유리 접시에 한동안 놓여 있기도 했다. 얼마 전, 커다란 사람 여러 명이 붙어서 조심조심 피아노를 거실에 실어다 두었다. 그들이 피아노를 들고 들어올 때 딸은 만세를 불렀다. 곧 나는 유리 접시에 놓였다.
    아빠의 무테안경이 손에 붙잡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악보를 읽어내려 하는 듯했다. 행진곡은 형편없었다. 딸은 그냥 웃었다. 건넌방에 누워있던 엄마도 일어나 부스스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빠가 오른쪽에서 멜로디를 연주하면 딸은 왼쪽에서 코러스를 연주했다.
    그날 밤도 어김없이 딸의 잠투정이 시작되었다. 그 애는 조금씩 잠에 들라치면 자꾸 오줌이 마렵다고 했다. 아빠는 딸의 등을 토닥이며 나지막이 노래를 불렀다.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 구두 사 가지고 오신다더니.”

    머지않아 칭얼거림은 잦아들고 곧장 새근대는 숨소리가 들렸다.
    그 집은 가족 중 누군가의 소유인 모양인지, 딸이 물려받을 예정이라고 했다. 누가 그렇게 말했더라, 단지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말을 어느 한적한 오후 낮잠 속에서 들었던 것 같다.

    “꿈을 꿨는데 아빠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더니, 아빠는 오늘부터 논어를 배우러 향교에 다닌다고 했다.

    “그걸 배워서 족보를 좀 해석해 보려고.”

    양손의 리듬이 일정하지 않아 젓가락 행진곡이 뭉개지는 것처럼 그렇게 족보를 읽고 있는 것일까.

  • 족보를 펼치면 도식적인 모양으로 무덤의 위치와 그 주변이 그려져 있었다. 그렇게 생긴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던 적이 있다. 정갈한 모습으로 누워 있는 무덤들 옆에는 곧 사과가 열릴 법한 나무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는데, 그 나무들이 놓인 길을 계속 걷다 보면 꼭 수평선이 나올 것만 같았다. 실제로는 그 길 끝에 호수가 있었다. 호수 한 편에는 드나들며 낚시를 할 수 있도록 간이 방이 딸린 배들도 있었다. 그 위로 새들이 날아다녔다. 물살을 가르며 날아오르는 새를 따라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마치 반짝이 종잇조각들을 흩뿌리는 것처럼 보였다.

    흩날리는 종이들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이윽고 폭죽이 터졌다. 커다란 원형 경기장의 바닥은 밝은 주황색으로, 하얀색 줄들이 그어진 넓은 트랙이었다. 알록달록한 색종이를 날리며 다양한 존재들이 시끌벅적하지만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이동하고 있었고 나는 그들을 구경하는 한편 트랙의 선을 따라 주장을 찾아갔다. 짙은 남색 경기복을 입은 그(녀)(them)를 발견했을 때 그(녀)(them)의 짧고 검은 머리가 살짝 젖은 채로 휘날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them)를 보자마자 그(녀)(them)가 여성(female)임을 느꼈지만, 그(녀)(them) 스스로가 그렇게 여기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녀)(them)가 가진, ‘단정 지을 수 없음’의 아름다움을 감각하면서 나는 그(녀)(them) 앞에 마주 섰다.

    “두고 온 게 있어서요. 찾으러 갔다가 다시 올게요.”

    주장은 공을 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허락을 받긴 했지만 빨리 다녀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없다. 곧 경기가 시작될 것이다.

    “이 경기에서 난 중요해.”

    트랙의 경계선들을 가로지르며 걷다 보니 어느덧 시냇물이 흐르는 자갈밭 위였다. 나는 문득 내 발을 감싸 흐르는 차갑고 얇은 물살을 느꼈고, 아 신발을 잃어버렸군, 하고 냇물의 상류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만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내가 무엇을 찾으려고 했었는지 쉽게 잊어버리곤 했다. 그들과 내가 계곡 어귀에 누워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많은 세월이 아주 느리게 지나갔다.









    떠내려온 신발들이 모여있는 웅덩이를 보았는데, 그중에는 내 신발도 있었다. 물속에 손을 넣어 건져 올렸더니 그 신발은 아기가 신을 법한 작은 운동화로 변해 있었다.

  • 할머니가 죽기 바로 전에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애미야. 나 이제 오줌 안 싼다. 그러니까 너네 집에 가고 싶다.”

    너무 짙은 초록색의 지하 주차장에 한참 서 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병원에 있던 모습이 기억나지 않는다. 산책하러 나가려던 참이었다. 할머니의 굳은 얼굴에 모시 천이 감싸지는 것을 보는 순간에도. 호수가 있는 도시에서였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우리는 배 위에 올라탔다. 나는 울지 않았다. 나는 그들과 여행 중일 때 늘 울상이었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여행인지를 몰랐다. 그래도 너무 짙은 숲속은 같이 걸어야 했다. 쉬지 않고 잠이 쏟아졌다. 내가 먼저 들어가겠다고 말하니, 우리 중 누군가가 내 팔에 매달렸다. 그 애를 내려다보며 문득 나는, 엄마로서 할 수 있는 말들을 떠올렸다. ‘들어가는 길’의 계단은 하나하나 커다랬고, 일정하지 않은 리듬으로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계단의 움직임을 조종할 수 있는 버튼은 오른쪽 벽에 붙어 있었고 나는 물건을 하나씩 들고 이동해야 했다. 반대편에서 연분홍색 단발머리를 한 새하얀 피부의 사람이 기다랗고 뾰족한, 시퍼렇게 날이 선 창을 들고 내 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가 입은 새빨간 기모노가 축 처진 채, 같은 빛깔의 액체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내 쪽으로 주의를 두지 않도록 눈에 띄지 않으려 각별히 신경 썼다. 나와 그는 반대 방향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딸은 달랐다. 온몸을 곤두세우고는 곧장 그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딸의 목덜미를 잡아당기며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왜 그래 너? 귀신이 너를 자꾸 오라고 부르니?”

    엄마답지 않은 말. 서럽게 울어도 하는 수 없어.

    한여름이면 물도 목이 마르는지 수위가 낮아져, 직접 강을 걸어 여의도까지도 다다를 수 있었다. 어머니의 오빠가 그곳에 살고 있었다. 나는 꼭 한 번, 아버지와 같이 그곳에 간 적이 있다. 곱게 싼 보따리를 버스에선 내가 들고, 전차에서는 아버지가 들고. 어머니도, 형도, 동생도 없이 아버지와 둘만의 시간이었다. 바지를 걷어 강물에 발을 담그니, 등짝에 흐르던 땀줄기 옆으로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나는 다리로 휘휘 물살을 저으며 물밑을 살폈다. 아버지는 벌써 저만치에서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히히 웃었다. 강물의 동심원도 웃음소리에 맞춰 동그랗게 퍼졌다. 멀리서 다리를 건너는 전차의 땡땡 소리가 귓전에서 위잉위잉 울렸다. 모기장을 치고 누나들과 밤늦도록 놀다가 지쳐 잠에 들었다. 나와 아버지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때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부터 몇 년간은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 보따리를 아무리 헤집어 봐도 비단 구두 같은 것은 없었다.

  • “그걸 두고 왔네. 좀 가져다줘.”

    햇볕이 너무 강하다. 여기 서 있기에 당신은 너무 기운이 없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데.
    저쪽에서도 걱정스러운 눈으로 당신을 계속 쳐다보고 있다.

    “얼른 가서 가져다줘.”

    안 돼.

    “얼른.”

    저쪽은 반대편으로 얼른 갔다.
    당신은 내 쪽으로 얼른 왔다.
    저쪽은 이쪽 편으로 가지고 왔다.

  • 명절인 듯, 여기저기서 전 부치는 기름 냄새가 났다. 나는 축제가 벌어지는 건물의 복도를 걸으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떠들썩한 가운데, 다들 내가 입은 옥색 한복에 대해 한마디씩 했다. 모두 웃는 얼굴이었다. 건물 1층의 입구로 내려오니, 어느덧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옥색 한복을 멋지게 빼입은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이가 건너편 건물의 위층에 있었는데, 비를 맞아서는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나는 그곳에 서서 하염없이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새하얬던 버선이 어느덧 빗물에 젖어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리본처럼 하늘하늘한 천을 들고, 길게 이어진 복도를 따라 같은 옷을 입은 친구들을 따라갔다. 우리는 무대에 설 것이다. 그러던 중, 맞은 편에서 돌아오던 나를 만났고, 어느새 ‘우리들’ 여럿은 황톳빛 갈색의 곡선이 두드러지는 의자에 둘러앉아, 작은 식탁을 가운데에 두고 서로를 둘러쌌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무언가를 확인했고, 그 증표로 연분홍색의 리본을 식탁 한편에 묶어 둔 채 무대로 향했다. 무대 저편에서 촉촉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